공각기동대 - 사이보그(Cybog)와 이마고 데이(Image Dei)
공각기동대 - 사이보그(Cybog)와 이마고 데이(Image Dei)
2029년,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뉴포트(New Port)라는 이름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이 도시가 속한 국가에는 두 개의 중요한 공안(公安) 부서가 있는데, 하나는 외교적인 문제를 담당하는 외무성인 공안 6부이고 다른 하나는 각종 범죄를 담당하는 기밀 부서인 공안 9부이다. 대충 CIA와 FBI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게다.
쿠사나기 여소령이 조금 늦게 9과에 도착했을 때에는 교통사고로 망가진 여자 사이버보디(cyber-body)가 벌써 도착해 있었고 요원들이 그녀의 보디 안에 있는 고스트(ghost)를 조사 중에 있었다. 그녀에게는 전뇌(전자두뇌)가 없는데도 고스트(ghost)가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9과 요원들은 그녀의 보조 전뇌 속에 누군가의 고스트가 복제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6과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조금 전에 실려 온 사이버보디를 회수해 가겠다고 주장한다. 외무대신의 사인까지 받아 왔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6과 요원이 확인해 보더니 감지된 고스트는 인형사의 것임을 알아냈다. '인형사(puppet master)'라는 별명은 이 녀석이 다른 사람의 전뇌를 워낙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해킹과 원격 조종을 자유자재로 하는 바람에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6과의 나카무라 부장과 9과의 아라마키 부장이 수거된 사이버보디 앞에서 인형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이버보디가 돌연 자가 동력을 발생시켜 깨어난다. 그리고는 인형사가 보디의 입을 통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신체를 소유한 적이 없었던 순수 의식이다. 광대한 네트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나의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수백만 년 전 원시 수프(soup)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던 것처럼 광대한 네트워크상에서 수많은 정보가 교류되던 중 갑자기 의식이라는 것이 저절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이버보디에 들어간 건 6과의 공격성 방어벽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 나 자신의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라고? 고래로 인간 영혼의 가장 독특한 특성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자유의지(free will)를 인형사는 자신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형사의 맹랑한 주장은 점점 도를 더해 간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나는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
뭐라고? 망명? 나카무라가 맞받아쳤다.
"말도 안 돼! 너는 단순한 자기 보존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그러자 인형사는 나카무라를 향해 신랄하게 반박한다.
"그렇게 말하는 너희 인간들의 DNA도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결국 DNA 안에 저장된 정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반박할 말이 딸린다.
"궤변이다!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네가 생명체인 증거는 뭐 하나도 없다."
"증명하기 어려운 건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는 꽤 많다. 그러나 영화, '공각기동대'가 제기하는 물음은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실제적이며, 직설적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존재론적 충돌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차별성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개보다 나은가?' '인간이 개보다 낫다면 어째서인가?' '인간을 개보다 낫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종국에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으로까지 관객을 인도한다.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인, 2029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또 그때가 되어도 바토나 쿠사나기같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로봇인 그런 사이보그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전조를 보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기술만으로도 벌써 인간과 로봇 사이의 존재론적 혼돈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로봇을 사람과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니(SONY)가 개발하여 대박을 터뜨린 애완견 로봇 '아이보', 노인들의 말벗 '코짱' 등은 로봇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는 데 훌륭하게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인간과 거의 똑같이 걷고 뛰는 '아시모'나 '와비안2' 등과 같은 휴머노이드(Humanoid) 로봇을 보고 있노라면, 또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알버트 휴보', '키스멧', '헐츠' 등을 보자면 현기증이 난다. 저게 로봇인가, 로봇의 탈을 쓴 사람인가? 인류는 뇌 스캔의 해상도를 시공간적으로 점점 높여 나감으로써 조만간 뇌의 연산 규칙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어(Moore)의 법칙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IT 기술은 머지않은 장래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슈퍼컴퓨터를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머지않아 생물학적 신체와 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점, 곧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특이점을 지나면 마침내 인간의 지능이 뇌에서 해방되어 물질과 에너지 속에 전 방위적으로 스며들게 될 것인데, 종국에는 물질과 우주의 기제들이 장엄한 지능으로 바뀌어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화엄경>이 말하는 인식론적 유토피아, 곧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동물과도 의식과 신체의 교환이 가능한 '성인 우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인형사라는 프로그램이 쿠사나기 여소령의 고스트와 결합되고, 그렇게 진화된 의식이 암시장에서 구입한 소녀의 사이버 보디 안에 다운로드 되었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된 우주의 출현을 목도한 것이다. 방대한 네트….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의 서신을 다소 엉뚱하게 인용하고 있는 영화, '공각기동대'는 바로 이러한 우주 진화의 제6기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진화 계통도의 맨 끝에 있는 인간 너머로 토그사, 바토, 쿠사나기, 그리고 종국에는 인형사로의 진화가 지속한다면, 그래서 언젠가 자율적 지능이 갑작스럽게 출현하여 인간의 지위를 넘보며, 자신의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망명권을 주장할 때가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새로이 개원하는 국회에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로봇 윤리 강령'을 헌법에 추가하는 개헌 논의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로봇이 인간과 똑같아지거나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어떤 이는 인간이 로봇의 애완견이 될 거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인간과 로봇의 간격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로봇이 인간처럼 될 수 있을 것이냐가 아니라 벌써부터 인간이 로봇처럼 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로봇의 존재론적 승격보다 인간의 존재론적 추락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진실은 이것이다. 인간의 추락이 없었다면 인간과 로봇과의 존재론적 충돌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많은 지성인은 너무도 당연하게 인간을 로봇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카니시 아쯔오는 말하기를, "인간은 600여 개의 근육과 150억 개의 뇌세포로 이루어진 궁극의 로봇"이라고 했다. 또 앨런 튜링(Alan Turing)이 말한 바로는, "로봇이 지적인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로봇과 모든 주제에 관해 얘기를 해 보고 인간과 전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면(튜링 테스트), 그 로봇은 지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보다 앞서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위너(N. Wiener)는 인간, 동물, 기계가 본질에서 자극과 반응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다나 해러웨이(D. Haraway)는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사이보그 선언'을 주창했던 것이다. 기계가 인간이기를 주장하기 훨씬 전부터 놀랍게도 인간은 자신을 기계라고 주장해 오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세기 유물론자 포이어바하는 인간을 '자신이 먹는 모든 것'이라는 내용의 '유물론 선언'을 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서 18세기의 라메트리(La Mettrie)는 <인간기계론>에서 인간은 기계와 다르지 않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 바 있다. 벌써 300년 전부터 인간은 자신을 기계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그러나 라메트리의 인간 기계론은 17세기 데카르트(R. Descartes)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가 위대한 인간 주체의 발견자라는 점에서 이것은 참으로 역설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신체(shell)'와 '정신(ghost)'을 가진 존재라고 했는데,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 뺀다면 인간은 기계나 다름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데카르트와 라메트리의 차이점은 데카르트가 '인간다움'의 증거로 주장했던 인간의 '정신'을 라메트리는 기계적 과정으로 해체해 버린 것뿐이다. 데카르트 이후로 인간 존재는 '공각기동대'가 보여 주는 것처럼 기억(ghost)과 인형(shell)의 결합으로 전락하였다. 인간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추락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 추락의 징후는 철학이나 테크놀로지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르쿠제(Marcuse)의 '1차원적 인간', 매킨타이어(Alarsdair Macintyre)의 '덕을 잃어버린 인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소비하는 동물' 등은 영혼 없는 몸뚱어리요, 배부른 돼지요, 꼭두각시 인형으로 추락한 현대인의 슬픈 초상이다. 그러니까 인형사가 망명권을 주장할 때, 사실 이 영화는 뒤집어서 '몸뿐인 너희 인간은 무슨 근거로 너희의 생명권과 자유권, 곧 인권을 주장하는데?'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똑같은 사이보그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그 사이보그에게도 인간의 존엄과 권위와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과 권위, 가치는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하여 오늘날의 지성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신 존재 증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 증명'이 되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자. 자, 인간성의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이것이 그리 중요한 문젠가? 그렇다. 중요하다! 만일 인간이 개보다 낫지 않다면, 그래서 인간 존엄의 기초를 정할 수 없다면, 천부의 인권 개념도, 헌법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개념도 허구가 된다. 그에 따른 생명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 사회적 청구권도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명과 문화도 지탱되기 어려워지고 말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보신탕을 먹기 위해서 개를 잡는 것이 가능하듯, 사람 고기나 가죽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 사회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간다움의 기초는 중요하다.
그러나 '공각기동대'가 알려 주는 바는 인간 존엄의 기초가 결코 인간 내부의 특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되었든 인간 내부의 특질은 모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기술이 끝내 모방할 수 없는 특질이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논리적으로 인간 내부의 자질이나 특성은 그 자체만으로 다른 유기체의 자질이나 특성보다 더 우월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특질은 그 자체만으로 '우열'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sein)는 당위(sollen), 곧 가치(wert)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 때문에 존재에 대해서만 다룰 수 있는 과학은 인간과 개의 다름(difference)을 무한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개보다 더 나은 이유에 대해서, 즉 개에 대한 인간의 차별성(discrimination)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 하여 과학은 '인간은 개보다 낫다'와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를 영원히 입증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진화는 불가능하다. 진화론자들 말대로 생물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진화(evolution)라고 부르는 것은 비과학이다. 변화(change)라고 해야 맞다. 이런 점에서 역사상 가장 큰 지적 사기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변화론(the theory of change)'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자신의 이론을 '진화론(the theory of evolut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이다. 가치가 없다면 진화의 방향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여 인류는 하루빨리 생물학 교과서에서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처럼 생긴 진화 계통도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트위터 흐름도 모양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인간 존엄이 인간 내부의 특질에서 유추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인간 존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인간 존엄은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가치론적 개념이라야 한다. 즉 인간 존엄이란 단순히 '수평적 차이'가 아닌 '수직적 차별'을 반드시 포함하는 개념이라야 한다. 둘째로, 인간 존엄은 인간 밖에서 와야 한다. 이성이든, 양심이든, 영성이든, 자유의지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인간다움은 인간 내부의 어떤 자질이나 특성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로부터 '부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 번째로, 인간 존엄을 부여하는 존재는 인간보다 가치론적으로 우월한 존재라야 한다. 그래야만 부여된 인간 존엄이 참되게 정당화될 수 있다. 마치 신하의 권위가 임금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인간 존엄을 부여하는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존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존재 역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 줄 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설을 토대로 창세기를 다시 읽을 수 있다. 아담의 존엄과 가치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질로부터 유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다. 성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을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개보다 나음'의 근거며, 헌법이 명시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기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많은 신학자는 이성(homo rationalis)이라고 하고, 혹자는 양심(homo ethicus)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영성이나 종교성(homo religiosus)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자유의지(home liber)라고도 했다. 이러한 식의 호모 복합명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homo faber, homo rudens, homo economicus, homo politicus….
하지만 이런 수사들은 인간의 자질과 특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은 뭔가? 창세기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왕의 형상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뜻은 왕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왕이기에 인간은 개보다 낫고, 자신의 발아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엄자인 것이다. 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뒤 이렇게 명하셨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 대해서 다윗의 시편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인간)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4~8).
그렇다. 인간의 존엄, 권위, 그리고 가치의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천부의 인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씌워 주신 영화와 존귀의 면류관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러한 인간 존엄은 자격이 아닌 은총이다. 인형사의 날카로운 주장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은총으로 받아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성의 역설인데, 인간이 신-의존적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인간관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존엄과 가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 의존적 존엄을 거부하고 자존적 존엄을 소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의 추락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은총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업적'으로, 그리고 '폭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엄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지게 된다. 여기서 인간 존재의 위기가 생겨났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추락한 인간은 마치 실각한 느부갓네살왕처럼(단 4:33) 개나 소나 로봇과 존재론적 혼돈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 시대의 인간을, 하나님의 영이 떠난 순수한 '살(바싸르)'로 묘사하고 있는데(창 6:3)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참상이며, 인간을 껍질(shell)로 규정한 '공각기동대'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너희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형사의 이 주장에 대해서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한 인간, 그리고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기꺼이 자처하는 인간이 대답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복음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께서 회복하셨다는 것이다. 인형사의 도발적인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는 침례의 현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과 함께 존엄과 권위, 가치를 은총으로 부여받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인간(vero homo)으로 사셨다. 그리고 그 예수는 인간과 사이보그 간의 영원한 간격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