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영화

거미집의 성 - 에덴의 쿠데타

Caleb Shin 2016. 10. 1. 17:01


거미집의 성 - 에덴의 쿠데타





귀신이라도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잃고 말 빽빽한 숲 속, 안개마저 자욱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산중에 웅장한 성 한 채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우뚝 서 있다. 그 성의 이름은 '거미집의 성'이다. 그 성 가장 안쪽, 가장 높고 은밀한 곳에 주군의 보좌가 있다. 보좌의 주인은 스즈끼다. 그가 앉은 보좌는 배신과 반역으로 얼룩진 '피의 보좌(the throne of blood)'다. 스즈끼 역시 그의 주군을 죽이고 그 보좌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휘하의 장수, 후지마키가 그 보좌를 탐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서 와시즈가, 다시 그 뒤를 이어서 미키의 아들이… 그 보좌의 주인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피의 보좌는 뭇 별들 위에 자리 잡은 신의 보좌의 상징이요, 거미의 성은 권력 의지를 일깨우는 사이렌의 손짓이요, 그 성을 자욱이 덮은 안개는 누구라도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의 알레고리다. 지존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 같아서 누구라도 그것을 한 번 마음에 품기만 하면 끝내 파국에 이를 때까지 전력으로 질주하고야 만다. 불행히도 이 욕망에 사로잡힌 인생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날파리처럼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가졌던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신마저 무참히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 이것이 '거미집의 성'이 잔인할 정도로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인생의 세밀화다.

모든 고전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거미집의 성'도 매우 일본적이면서, 극히 세계적이다. 구로자와 아키라는 17세기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20세기 일본의 흑백영화로 리메이크하는 데 성공했다. 이 리메이크 작품에서 그는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화려한 세익스피어식 문체와 영국적 색채를 깔끔하게 제거하고, 빈자리를 일본적인 물감으로 색칠하는 데 성공했다. 스코틀랜드의 왕권 투쟁이라는 설정은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의 권력 투쟁이라는 설정으로 무리 없이 전환되었고, 엘리자베스 시대극은 일본의 전통극인 노(能)와 가부끼(歌舞伎)로 훌륭하게 변모되었다. CG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자유자재로 운무(雲霧)를 부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미 숲을 자욱이 채운 흑백의 안개 장면은 영락없이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수묵화다.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분명 일본의 와(和)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했을 것이다. 즉 자신의 본분, 이치닌마에(いちにんまえ)를 지켜 평생 자신의 천명(天命)을 잇쇼겐메이(いっしょうけんめい)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조화로운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일본적 가치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는 말이다. 하여 그들은 '섬기는 자(侍)', 사무라이로서의 제 본분을 망각한 채 감히 다이묘(大名)의 자리를 넘본 와시즈를 와(和)의 파괴자라고 성급하게 낙인찍었을지 모른다. '거미집의 성'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본적인 요소들을 얼마든지 찾아 곱씹고 음미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시대와 장소,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일본적인 색깔로 잔뜩 덧입혀져 있긴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추어 보면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현대에서부터 출발하여 전국시대의 일본과 17세기 영국을 꿰뚫고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국의 위대한 영화감독 장이모우(張藝謨)의 '황후화'나 J. R. 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판타지 문학, <반지의 제왕>의 주제와도 상통한다. 그런가 하면 희랍의 비극을 추동하는 극적 추진력이 제 본분을 망각한 채 감히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인간의 휘브리스(hybris)와 그에 대한 신의 충돌로부터 나온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렇듯 '거미집의 성'이 탐구하고 있는 것은 융(K. Jung)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말했던 심연의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텍스트를 추가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텍스트의 원형이 되는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의 이미지는 유치한 동화적 상상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지나가는 '심리학적 원형'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영화는 성서 독자로 하여금 아담 이야기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장을 정치적 쿠데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아담 이야기는 호기심 때문에 기어이 상자를 열어 보고야 말았다는 판도라 신화처럼 읽혀 왔다. 이러한 독법의 유익에도 성서 전체 내러티브의 일관성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결점이 많다. 존 요더(John Yoder)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의 제안처럼 우리는 성서 내러티브를 정치적인 관점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제1성의 성주 와시즈는 후지마키의 쿠데타를 진압한 덕에 북성의 성주가 된다. 북성의 성주 자리는 주군 스즈키 다음 가는 버금 자리이다. 이것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지위이기도 하다. 아담이 부여받은 Imago Dei, 곧 하나님의 형상은 왕적 지위로, 하나님 다음 가는 버금 자리를 의미한다. 북성의 평화는 에덴의 평화를 연상케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 풍성하게 수확하는 들판의 농부들, 군역이나 노역에 시달림 없이 한가로이 말을 부리는 성민들… 이 원초적 평화의 땅은 영락없이 에덴의 모습이다.

북성의 평화는 물리적인 상태일 뿐만 아니라 와시즈의 영혼의 상태이기도 하다. 와시즈가 유령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이브가 뱀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의 내면의 상태는 다윗이 시편 131편에서 노래했던 평정 상태(Gelassenheit)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주군을 향한 충성과 신의로 가득 찬 그의 가슴은 그 어떤 화살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숲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노랫소리가 독이 묻은 화살촉보다도 더 예리하게 그의 흉갑을 관통하고 만다.

인간은 그저 헛되이 썩어져 버릴 티끌
인생은 한갓 가느다란 실
꽉 조여 매 허덕대는 허리띠
야망의 꽃봉오리를 피웠다 지우는 여린 꽃줄기
썩어질 언행은 그저 정욕과 탐욕뿐…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악령의 이 노래는 실상 와시즈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욕망을 폭로하는 예언자의 노래요, 그의 비극적 종말을 경고하는 미덕으로 가득 찬 노래다. 악령의 간교함은 존 밀턴이 그랬듯이 경고하면서 유혹한다는 데 있다. 악령이 와시즈와 미키에게 들려주었던 모든 말들 중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이브가 들었던 뱀의 모든 말이 그러하였듯이…뱀은 늘 진실을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늘 거짓을 가리는 기만이다.

"오늘이 가기 전 그대는 북성의 성주가 될 것이오."
"그리고, 머지않아 거미성의 주군이 될 것외다."

그 치명적인 유혹의 언어는 잠들어 있던 와시즈의 시커먼 욕망을 눈뜨게 했다. 뱀이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는 약속으로 아담 부부의 욕망을 눈뜨게 한 것처럼… 악령의 두 개의 예언은 사실 예언이 아니다. 첫 번째 예언은 와시즈의 공덕을 고려해 볼 때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추론이다. 그리고 와시즈가 거미성의 주군이 된다는 두 번째 예언은 그것이 마치 운명이요, 신의 뜻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역모를 꾀하라'는 유혹일 뿐이다. 악령은 운명의 형식으로 와시즈의 탐욕을 정당화해 주고, 신의 이름으로 반역을 축복했다.

하지만 운명은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와시즈는 언제고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와시즈는 곧장 아내에게 그 예언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아담이 그랬듯이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가기 시작한다. 이미 와시즈는 운명의 노예였다. 우리는 여기서 악령이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잦는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녀는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를 공격하는 거미의 신이요, 인생의 실을 잦는 운명의 여신 클로소(Clotho)의 동양적 현신이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날파리처럼 유혹의 언어에 사로잡혀 점점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와시즈의 운명을 구로자와 아키라는 매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내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서다. 감독은 '와시즈'의 부인의 이름을 '아사지'로 정함으로써 둘의 동일성을 강조했다.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와시즈와 아사지도 한 사람이다.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와시즈는 슈퍼 에고(super ego)고, 아사지는 이드(id)다. 즉 와시즈와 아사지의 대화는 실은 한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미학적 장치였던 것이다. 와시즈는 양심과 도덕, 윤리, 명분을 대변하고, 아사지는 본성과 탐욕, 야망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와시즈는 검은 옷에 과장된 얼굴을, 아사지는 흰옷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극도로 단순한 배경을 한 널찍한 노극의 마루 무대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와시즈와 아사지의 모습은 무척 초현실적이다. 사각거리는 차가운 옷깃 소리를 내며 고뇌하는 와시즈의 주변을 분주히 쏘다니는 아사지의 절제된 움직임은 정중동(靜中動)의 미의 극치를 보여 준다. 지루할 정도로 절제된 이 내실(內室) 신은 격동하는 와시즈의 불안한 영혼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사지가 음산한 새소리마저 거사의 결행을 촉구하는 신의 음성으로 들을 때 와시즈의 영혼은 이미 운명의 거미줄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였다. 이브가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고 느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정확히 아사지의 마음이었다. 밀턴의 말대로 뱀은 조종하지 않았다. 다만 무대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연기는 각자의 몫!

결심을 굳힌 와시즈는 아사지가 쥐여준 창을 들고 나간다. 마치 이브가 준 선악과를 아담이 베어 물듯… 카메라는 내실에 홀로 남은 아사지만을 비춘다. 그리고 잠시 뒤 와시즈는 피가 묻은 창을 들고 뒷걸음질로 나타난다. 반역이다! 스즈끼의 모살 장면은 관객의 상상력에 맡겼다. 이것은 성서 독자에게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는 실은 주군 야훼의 등에 칼을 꽂고 쿠데타를 감행했던 것이다.

드디어 와시즈는 피의 보좌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평온하지가 않다. 왜냐? 와시즈는 자신이 피의 보좌의 주군이 아니며, 결코 피의 보좌 주인이 될 수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주군의 자리라는 것은 다음 반역자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때까지 잠시 대기하는 자리일 뿐이다. 신이 아니라 신 '처럼' 되리라고 했던 뱀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누구도 보좌의 주인이 아니라면 대체 보좌의 주인은 누군가? 운명의 여신이다. 스즈키, 후지마키, 와시즈, 미키의 아들은 모두 장기판 말에 불과하다. 말을 움직이는 이는 악령이다.

마찬가지로 에덴의 쿠데타에서 승자는 뱀이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쿠데타의 결과 보좌는 아담이 아니라 뱀에게 넘어갔다. 아담은 뱀의 쿠데타에 이용만 당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로 이 세상의 주권자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이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그 나라를 되돌리실 때까지….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 와시즈에게 이제 미키의 망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시즈는 홀로 보좌를 독점하기 위해서 오랜 절친 미키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했지만 미키만 죽었다. 아사지에게도 스즈키 피의 절규가 들리기 시작한다. 칼로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망령, 씻어도 씻어도 결코 씻기지 않는 핏자국….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평화를 잃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이 벗은 몸인 줄 깨달은 아담 부부의 운명이기도 했다. 죄는 영혼에 새겨지기에 물이나 비누로 씻어지지 않는다.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 2:22)."

악령이 예언한 다음번 피의 보좌 주군 미키의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거미성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다. 하지만 역전의 장수 와시즈는 용맹을 잃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운명의 노예이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운명의 힘으로 주군이 되었다면 미키의 아들이 다음번 주군이 되리라는 운명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 시점에서 캐빈처럼 자신의 자유의지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운명의 여신을 찾는다.

'거미숲이 거미성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그대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지지 않을 것이오.'

여기서도 악령은 진실만을 말했고, 와시즈는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지지 않으리라'는 예언만 덥석 집어 물고 헛된 용기를 내어 본 것이다. 하지만 악령은 거미숲이 거미성으로 이동하는 것을 대비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경고하며 유혹하는 악령의 미덕은 한밤중에 나무를 패는 소리와 집을 잃은 새떼들의 침입을 통해서 나타났다. 하지만 스스로 미혹되어 이성을 상실한 와시즈는 결코 운명의 거미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다. 어리석게도 그는 모든 부하에게 악령의 신탁을 말해 주었고,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단축하는 최고의 악수가 되고 만다. 왜냐? 거미숲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와시즈는 부하들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죽음, 이것이 반역의 비참한 결과다.

하지만 바로 이 마지막 대목에서 성서 내러티브는 영화와 전혀 다른 결론으로 끝난다. 배신당한 야훼는 자신을 배신한 아담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모색한다. 분명 아담은 죽어야 마땅한 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파국에서 건져낼 구원의 길을 모색하신다. 왜냐? 그것은 반역자라 할지라도 내칠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다름 아닌 십자가다. 죄의 대가를 스스로 걸머지기로 작정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