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이브의 스커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이브의 스커트
옷과 수치심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론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비정숙성 이론은 옷 때문에 수치심이 생겨났다고 본다.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와 같은 이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천진한 타이티 여인들 같은 고상한 야만인들(noble savage)이 문명화 과정을 통해서 수치심을 학습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정숙성 이론은 수치심 때문에 옷이 생겨났다고 본다.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err) 같은 이들은 특정 신체의 노출에 대한 수치심은 인간 본성에 속한 것이며, 이 때문에 어떻게든 옷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체 옷은 왜, 무슨 목적으로, 언제부터 입게 되었을까? 옷과 수치심의 관계는 무엇일까? 놀랄 만한 학문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옷의 기원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옷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3장 7절은 이런 점에서 심대한 의의가 있다.
선악과 이야기가 유치한 신화적 언어로 씌어져 있지만 이 구절은 인간의 수치 체험의 본질과 옷의 기원, 문화의 기초, 나아가 인간 실존의 비밀까지 알려 주는 놀라운 구절이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구원론적 프레임으로 읽혀지는 바람에 아담과 이브의 수치 체험과 옷을 죄의 결과로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나 설교가들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치마를 해 입었다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수치심이 죄책감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근원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죄책감과 수치심은 서로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감정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성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욥(욥 10:15)이나 다윗(시 22:6), 예수(마 27:29)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대단히 강렬한 수치심을 경험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아담과 이브는 수치심은 느꼈지만 맹랑하게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창세기 2장 25절에 따르면 선악과를 따먹기 전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꽤 많은 성서 독자들은 최초의 인간 상태를 타이티 여인들과 같은 순진무구한 타뷸라 라사(Tabula Rasa)이거나 혹은 유아적 미숙함의 상태로 가정하곤 한다. 물론 이건 순전히 엉터리 해석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는 최초의 인간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지성과 소신을 가진 기자 지망생 앤드리아는 한 1년 정도 패션 잡지사에서 일해 볼 요량으로 '런웨이'사에 들어간다. 그녀가 그곳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리고 미란다 프리슬리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다.
앤디가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소신? 지성? 내면의 아름다움? 자기만의 스타일? 아니다. 앤디는 자신의 패션 수준을 평가하는 흉측한 타인의 시선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앤디는 그녀를 지지하는 애인 네이트와 친밀한 친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으며, 앤디가 그들로부터 받았던 시선은 사랑과 관심의 눈빛이었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일부로 따스하게 응시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그런데 말단 비서까지 자부심과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는 패션 잡지사 '런웨이'사에 출근하면서부터 앤디의 사정은 달라졌다.
그녀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뭇 사람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그녀는 44사이즈가 대부분인 그곳에서 신체 사이즈가 자그마치 66이나 되면서도 열량 많은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어 재끼며 몸에 잔뜩 끼어 있는 셀룰라이트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별종이다. 그녀는 보세품 옷가게에서 싼값에 산 보풀이 잔뜩 일어난 스웨터에, 촌스러운 구두를 신고, 감히 미란다 프리슬리 앞을 오락가락하는 무뇌녀였다. 결정적인 것은 그 꼴에 무엄하게도 미란다 앞에서 패션계를 비웃었던 것이다. 미란다는 콘셉트 회의 자리에서 패션을 비웃은 앤디를 박살 내 놓는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블루 스웨터를 껴입고 대단힌 지성이나 갖춘 양 잘난 척을 떠는데 넌 니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어. 그건 그냥 블루가 아냐. 정확히 셀룰린 블루야… 패션계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그 (셀룰린 블루) 스웨터를 니가 패션을 경멸하는 상징물로 선택하다니…그야말로 웃기지 않니."
자신을 경멸하는 미란다의 시선 앞에서 앤디는 벌거벗겨지는 체험을 한다. 그 순간 이브처럼 앤디는 눈이 밝아져 자신이 벗은 것을 깨닫는다. 무엇이 그녀를 벌거벗게 하였을까?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타자로서의 미란다의 시선 때문이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앤디를 사물화하고, 무화시켰다. 미란다의 시선은 참으로 흉측한 타자의 시선이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미란다의 시선은 권력자의 폭력적 시선이요, 지배와 감시의 시선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아담과 이브는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 폭력적 시선을 교환했다. 하여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 앞에서 벌거벗겨진 존재로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샤르트르가 옳게 지적했듯이 타자의 시선은 특정 개인의 시선이라기보다는 눈이 지워진 초월적 시선이요, 내재화된 우주적 시선이다. 즉 아담과 이브는 단순히 서로의 시선 앞에서라기보다는 그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신적 시선을 온 몸으로 감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치마를 해 입을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숨을 곳을 찾아 나무 숲 속으로 몸을 숨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콘셉트 회의 자리로 가 보자. 그곳에서 앤디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미란다는 그렇지 않았다. 왜인가? 미란다는 앤디가 입고 있지 않았던 뭔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란다가 입고 있었던 옷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으로 만든 의상이 아니다. 미란다가 입고 있었던 옷은 바로 바로 프라이드(pride)다!
영화 제목은 프라이드와 프라다 브랜드의 말놀이다. 악마가 입고 있는 건 프라다가 아니라 프라이드라는 뜻이리라. 미란다는 자존심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하지만 앤디에겐 그것이 없었다. 물론 앤디에게도 지성과 소신이 없었던 건 아니고 나름의 스타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란다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마치 강간당하듯 미란다에 의해서 거칠게 벗겨진 것이다.
프라이드는 옷의 본질이다. 옷의 본질을 프라이드로 본다면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 원시 부족도 나름의 옷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팬티 없는 부족은 있지만 프라이드 없는 부족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모든 부족은 자신들 부족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표시하는 장식과 문양,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름의 토템이나 금기, 제의, 규율,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그들의 자존심과 연결되는 한 그것들은 그들의 옷이다.
추가적인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요, 모든 문화의 공통된 토대로 보았던 근친상간 금기는 아담과 이브가 입은 옷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천이 아니라 프라이드가 옷의 본질이기에 벌거벗은 사람도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있다.
영화 '패션쇼'의 마지막 장면, 시몬 로의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나체로 행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프라이드를 입고 플로어를 행진했기 때문이다. 미란다 앞에서 앤디는 자신에게는 프라이드가 없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꼈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경험한 수치 체험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에게 프라이드가 없음을 인식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프라이드다.
앤디가 지미 추 슈즈를 신었을 때,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치마를 해 입었을 때 그들은 자신에게 없던 프라이드를 입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프라이드의 본질은 뭔가?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프라이드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지라르에 의하면 욕망이란 닮고 싶은 모델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들이 명품을 욕망할 때 그들은 명품 자체를 욕망한다기보다는 닮고 싶은 모델, 혹은 경쟁자를 모방하고 싶어서 명품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명품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욕망의 매개자를 닮는 것이다.
앤디가 모방하기 원하는 욕망의 매개자, 혹은 모델은 미란다다. 앤디(욕망 주체)는 자신이 미란다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미란다(욕망의 매개자)를 모방하기 위해서 명품(욕망의 대상)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왜 모방하고 싶어 하는 걸까? 지라르에 의하면 주체가 매개자를 모방하기 원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다!
존재 가치, 바로 이것이 진짜 욕망의 대상이다.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바로 이 형이상학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라르의 욕망 이론은 아서 러브조이(Arthur O. Lovejoy)의 존재의 사다리 개념과 연결된다. 욕망의 세계의 땅은 평평하지 않고 기울어져 있다. 그 땅의 한쪽 끝은 지옥의 나락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한쪽 끝은 천상의 영광을 향하고 있다. 이 기울어진 땅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자는 수치심을, 위로 기어 올라가는 자는 프라다를 경험한다.
명예에서 수치로 이어지는 기나긴 존재의 사다리, 곧 지존자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존재의 위계가 만들어 내는 피라미드는 모든 고대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세계상이다. 앤디는 미란다를 모방함으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존재 가치를 흡수하고자 했다. 결국 옷이란 존재 가치의 획득 수단이요, 나아가 존재 가치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모방하고자 했던 욕망의 매개자는 누굴까? 야훼였다! 그들은 신을 모방하여 신이 가지고 있는 존재 가치를 흡수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 텍스트가 욕망의 가장 은밀한 본성을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욕망은 매개자를 모방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개자를 추월하여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요, 종국에는 신을 죽이고 신이 되고자 하는 반역 의지이다.
수치 체험을 한 앤디는 프라이드를 입기 위해 나이젤로 변신한 존 밀턴의 인도함을 받아 의상실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순간 그녀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 세계는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존재 가치의 서열의 세계다. 그녀가 명품을 걸치는 순간 그녀는 존재의 사다리의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게 된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녀도 프라이드를 입게 된다.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앤디는 에밀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nobody)'였다. 하지만 그녀가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이제 수석 비서 에밀리와 경쟁한다. 처음에는 새 에밀리로 불렸지만 앤디는 곧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오래지 않아 앤디는 에밀리 대신 제임스 홀트의 스케치를 받아오고, 미란다의 집에 책을 가져다 놓고, 쌍둥이 숙제를 해 주는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패션의 왕국, 파리로 미란다를 수행하는 수석 비서가 된다. 에밀리를 밟고서 말이다.
파리는 위대한 패션 아티스트들이 거니는 신들의 동산, 곧 올림포스(Olympus)다. 그곳에는 존재의 사다리 최정상에 우뚝 서 있는 제왕들, 곧 할스톤, 라거펠드, 드 라렌타 같은 이들의 신전이 있다. 미란다 프리슬리도 그곳에 자신의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패션의 세계지만 그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세계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최고가 될 수 있는 세계다. 미란다는 시시때때로 자신을 위협하는 '런웨이' 사장, 자클린, 크리스천 톰슨 같은 경쟁자들과 피나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를 위해 결혼과 가정도 포기해야 했다. 미란다는 끝내 그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정상의 자리를 유지한다.
그녀가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그녀를 숭배하는 수많은 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디자이너, 편집자, 작가들에게 그녀는 이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그녀는 신이다. 그래서 그녀는 악마다. 그리고 악마는 프라이드를 입는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그들도 앤디처럼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존재의 서열 구조에 편입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존재 가치를 승격시키고자 치마를 해 입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피라미드 최정상에 독재자처럼 우뚝 서 있는 야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후지마키를 죽이고 피의 보좌를 찬탈했던 와시즈처럼 말이다.
인간은 엿새째 날 동물들과 함께 창조되었으며, 그의 질료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흙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후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부여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 버금가는 존귀한 자리요, 왕적 위엄과 주권을 가진 자리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아담과 이브의 존재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신적 존재 가치로 충일한 상태였다. 만일 옷의 본질을 존재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아담과 이브는 이미 야훼의 영광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창세기 2장 25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지 않아 나체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아담과 이브에게 있었던 존재 가치, 그리고 그들이 입었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옷은 전적으로 은총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순전히 인간에게 덧씌워진 것으로서 그들 스스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요, 또 그들이 그것을 소유할 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덕에 존귀한 자로 승격되었다.
여기서 선악과의 상징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악과는 베어 물어 뱃속에 삼킬 수 있는 과일이다. 이는 존재 가치의 사유화요, 자격의 획득을 의미한다. 뱀의 유혹은 아담과 이브가 단순히 신이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이 될 만한 자격을 스스로 그들의 뱃속에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부여되는 은총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존재 가치를 합당하게 소유한 자격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imago Dei,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존재 가치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그것은 남의 것을 빌린 것이요, 구걸하듯 받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뱀이 약속한 존재 가치는 자존적인 것으로서 당당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은총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남의 것은 필요 없다. 내 것을 가질 테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형상을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순식간에 존재가치의 추락을 경험한다. 마치 느부갓네살 왕이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었던 것처럼 에덴의 왕은 순식간에 동물 중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인간은 이제 단순히 동물 중 하나요, 질료는 흙에 불과하고, 고스트(ghost)가 내장된 텅 빈 껍데기(shell)이고 만 것이다. 인간 추락, 바로 이것이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을 느낀 한 가지 원인이다. 선악과를 먹어 자존적 존재 가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가치 평가자, 곧 심판자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온 우주에 단 한 분의 심판자와 그분의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있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후 모든 인간은 심판자가 되고, 그들 모두는 그들 각자의 평가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평가하는 자인 '인간'이라고 부른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평가는 가치를 만들어 낸다. 아담의 평가에 의해 이브의 가치가 생겨나고, 이브에 평가에 의해 아담의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 그 둘은 서로를 평가하고, 서로에게 평가받았다. 둘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낯선 타인의 시선을 감지하게 된다. 이 낯설고 흉측하며 폭력적인 시선 앞에서 이들은 벌거벗겨진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그들이 느꼈던 수치심의 본질이다.
바닥으로 추락한 인간은 첫 계단부터 하나씩 존재의 사다리를 올라가야만 했다. 그들에겐 존재 가치가 필요했다. 자신이 존엄하고, 명예롭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자기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옷이 발명되었다. 문화 인류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인간은 자연 상태와는 차별(discrimination)되는 문화로 옷 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말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문화적 존재며, 문화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악마는…'의 결말은 다소 진부하다. 그녀가 미란다로부터 돌아서서 패션의 왕국을 떠난다 해서 해방될 수 있을까? 천만에! 그녀는 새로 취직한 잡지사에서 또 다른 옷을 입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음으로써 인간은 프라이드와 존재 가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안정적이지 못하며, 불안하다. 언제라도 벗겨질 수 있는 엉성한 옷이며, 언제라도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 불안한 가리개다.
기울어져 있는 경사로에 위태롭게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서 있는 인간 실존, 여기서 실존적 불안, 곧 앙스트(Angst)가 기원한다. 인간 실존의 위기는 미란다를 등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시 옷 입혀 주실 때 비로소 해소된다. 이것이 가죽옷의 의미요, 십자가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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