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 자끄 엘륄(Jacques Ellul)의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 문제
2014년 4월, [물 근원을 맑게] 기고
1. 문제제기: 정치적 중립 vs. 정치적 참여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와 관련된 담론을 살펴보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딱 두 가지 가능성만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정치적 중립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참여다. 다른 말로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틀렸다. 최소한 자끄 엘륄(Jacques Ellul)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2.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중립의 문제
먼저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관점을 생각해 보자. 말이 좋아 정치적 중립이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정치 문제에 손 떼고, 신경도 쓰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식의 사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자. 동방정교회가 비잔티움 제국과 분리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또한 서방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유럽 정치의 이슈로부터 분리된 적이 있었던가? 독일의 루터, 제네바의 칼뱅,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처럼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정치적 중립이란 불가능하거나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일은 일부 은둔자들에게나 가능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 국가와 교회는 늘 한데 얽혀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현상을 학자들은 세속화(secularization) 현상과 연결시켜 생각하곤 한다. 17세기 이후 전개된 이런 세속화 현상, 즉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움직여가면서 기독교 신앙은 점차 공적 영역에서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문명국가 거의 대부분은 국가교회를 거부하거나 그 중요성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앙은 공적인(public) 영역에서 철수하여 사적인(private) 영역 속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신앙은 이제 개인적 취향과 비슷한 것이 되었다. 이를 소위 신앙의 사사화(privatization)이라 한다. 그러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견해는 매우 최근에 등장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무엇이 문제인가?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정치적 중립이란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영역에서 떨어진 중립지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엘륄의 표현대로, “아무튼 정치는 존재한다.”({정치적 착각}, 267) 정치의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표현대로 ‘모든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비정치적 행위가 실상은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가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교회 지도자들을 최고의 귀빈 대접을 하곤 하는데, 왜 그러겠는가?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치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최고의 정치적 포획대상이다.정치적 중립이라는 관점은 신학적으로도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중립이란 성육신을 부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이란 기독교 신앙과 정치의 영역이 산뜻하게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인데, 이는 마치 옛날 영지주의자들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분리주의적 태도는 위선이며, 기독교 신앙을 추상화시키는 반성육신적태도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1)
3.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참여의 문제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라는 관점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개념 있고, 정의로운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닥치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치적 참여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어찌 예외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얘기를 얼마나 자주 들어왔는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의 밑바탕에는 ‘정치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다. 만일 모든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두가 투표에 나선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문제들은 고쳐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정치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자끄 엘륄에 의하면, 정치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으로 살게 하거나, 참다운 행복을 맛보게 하거나, 정신적 풍요를 누리게 하는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마치 정치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둥, 모든 것은 결국 정치로 통한다는 둥, 그래서 모든 시민은 발 벗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둥, 이런 식의 정치적 환원주의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환상(political illusion)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일종의 과대평가다.({정치적 착각}, 5, 6장) 이처럼 과대평가된 정치는 늘 시민들을 좌절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정치참여는 또 다른 좌절을 맛보게 된다. 양심적이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정치를 관련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으로 정치를 새롭게 변혁시키고 싶은 열망에 종종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기독교화(Christianization)하려고 할 때마다 나타나는 결과는 늘 기독교가 정치화(politizaion)되곤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외형상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섬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위해서 봉사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회는 늘 기존 정치 체제를 위해서 봉사해 왔다. 엘륄은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왕 밑에서 왕당파였고, 나폴레옹 밑에서는 제국주의자가 되었으며, 공화정 밑에서는 공화주의자였다.”({무정부와 기독교}, 40) 그리고 최근에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있다.({무정부와 기독교}, 126) 이처럼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늘 기존 정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감당해 왔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는 걸까? 현실정치라는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양당제 정치 구도 하에서 정치 참여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당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야당을 지지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에 없다.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다는 것도 그 양당에서 내세운 후보들 중 한 명을 정치 지도자로 뽑아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에 참여한다는 말은 극소수의 진보성향을 제외하면 새누리당을 지지하거나 (현재 창당 준비 중인) 통합신당을 지지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 되고 만다. 즉 현실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정치참여는 이미 만들어진 경기장과 경기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선택의 제한성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제한은 직접 정치활동을 하려고 할 때 더욱 심해진다. 만일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새 정치’를 하기 원한다고 해보다. 그는 먼저 기존 법률에서 정한 방식으로 정당을 조직하고, 그런 다음 국민들의 지지를 모아야 한다. 지지를 얻지 못하면 그의 정치적 실험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국민의 지지란 결국 권력인데, 권력이 없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이고 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충분한 국민적 지지를 얻을 자신이 없다면 그는 결국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이나 통합신당에 입당원서를 내는 것이다.
최근 안철수 의원의 다소 혼란스러운 행보는 이러한 현실 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새 정치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치 않으나 그가 새 정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 새 정치를 하기 위해서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그는 먼저 권력부터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뜻은 기존 정치 세력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빼앗아 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기존 세력이 순순히 권력을 내놓겠는가? 결국 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권력 쟁탈전을 벌여야 하고, 이러한 권력 쟁탈전은 모두의 사활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함을 의미한다. 그 와중에 본말은 전도된다. 비전이나 노선보다 권력 게임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도 봤듯이 권력 장악을 위해서라면 비전이나 노선도 얼마든 바꿀 수 있는 것이 현실 정치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 장악 게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4. 제 3의 길
1) 예수의 정치학
그렇다면 제 3의 길은 존재하는가? 있다! 우리는 제 3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예수의 정치학}에서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서 탐구했다. 예수는 정치적 존재였는가, 비정치적 존재였는가?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예수가 놀라울 정도로 정치적 존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의 정치성은 기존의 현실 정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치성이라는 것이다.({예수의 정치학} 참조)
사실 성서는 정치적 문서다. 에덴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의 묵시에 이르기까지 신구약성서 66권은 왕권과 권력 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음모, 배신, 왕위 찬탈, 그리고 이를 다시 회복하려는 세력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성서 내러티브의 중요 플롯을 구성한다. 그러한 정치 이야기 한 가운데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는 정치적 존재다. 예수의 탄생이 헤롯 대왕을 두렵게 만들고, 유다에 파견된 로마 제국의 총독이 예수가 제국에 대한 모반을 획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문하는 것에서 우리는 예수의 정치성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빌라도: “네가 왕이냐, 왕이 아니냐?”
예 수: “나는 왕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 예수는 ‘왕’이시다! 그리고 예수가 왕이라는 이 선언만큼 예수의 정치성을 더 잘 보여주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지구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나라는 통상적인 왕국이나 제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왕국이라는 뜻이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모든 국가가 폭력에 의해서 건설되고 유지될 수밖에 없으나 예수의 왕국은 사랑으로 건설되고 유지되는 나라다. 그래서 예수의 왕국은 세상 왕국과는 다르다!
2) 스파이
예수의 정치적 이중성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이중성을 만들어 낸다. 자끄 엘륄은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스파이’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엘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이중국적자다. 한편으로 그는 이땅의 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두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스파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50)
가. 초대교회의 모범
이러한 이중국적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우선 그들은 충실한 로마 시민으로 살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훌륭한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은 로마 제국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다. 당시 기독교인은 제국의 상당히 불공정한 납세의 요구에도 군소리 없이 성실하게 순종했다. 그들은 언제나 선을 행하고, 구제하며, 제국의 치안 유지에 협조했으며, 성실하게 시민적 의무를 다했다. 심지어 카이사르와 관료들을 위해서 늘 기도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치 영혼이 몸속에 거하듯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신실한 제국의 시민으로 살았다.({디오게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참조)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시민 이상의 삶을 살아냈다. 그들은 단순히 제국의 법이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더욱 상위의 법에 순종하며 살았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가 명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산상설교는 그들의 참된 주(Lord)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명(御命)이었다. 그리스도의 어명을 따르는 삶은 제국 시민의 삶의 수준을 넘어선다. 예컨대, 제국의 시민법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훔치지 말라고 요구했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거저 주라는 그리스도의 어명을 따랐다. 시민법이 다른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고 요구했다면, 성도들은 자신을 폭행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산상설교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애썼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시민법보다 상위의 법인 그리스도의 어명을 지키고자 했을 때, 종종 그들은 제국과 충돌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실한 제국의 시민으로 살기는 했으나 그들은 시민법과 그리스도의 어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어명을 따르기로 결단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제 숭배 거부다. 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한 이유는 그들의 원초적 신앙 고백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는 주(Lord)시오,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 고백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만일 예수가 주(Lord)시라면, 카이사르는 주(Lord)가 아니다.’ 여기서 바로 황제 숭배 거부 행위가 나타났던 것이다.
황제 숭배 거부는 단순히 종교적 형태의 참배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참된 왕이요, 현인신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형태의 통치 이념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해서 초대교인들은 그러한 통치 이념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그러한 고백을 필요로 하는 공공 행정 서비스도 거부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병역 거부는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으며 입대한 그리스도인이나 혹은 군에서 예수를 믿게 된 병사라 할지라도 살인을 거부했다. 오늘날로 치면 집총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살인을 하지 않는 군인을 어디다 쓰겠는가. 켈수스(Celsus)라는 로마의 지식인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회적 거부는 대단히 악명 높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켈수스를 논박함}, VIII. 21-74.)
나. 세상적 시민의 의무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를 한국적 상황에서 한 번 적용해보자. 한국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은 먼저 대한민국의 평균 이상의 시민적 의무와 덕을 지키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는 누구보다 대한민국의 법률을 잘 지키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며, 다양한 시민적 의무를 준행해야 한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가 진정으로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해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가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할 때 그에게는 정치적 자유가 주어진다.
“따라서 어떤 사상, 교리, 혹은 정치 운동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 세상에서 충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알고 보면 습관이나 고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사는 시대에 따라 당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입장을 취하여 좌익이 될 수도 있고, 우익이 될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입장들이 인간적 관점에서 상호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토대를 추구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57)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에 충성할 자유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할 때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다. 단지 이 세상이 무질서로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보존의 질서 가운데 있게 할 수는 있다. 단순한 보존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보존의 질서와 일치할 만한 정치 사회적 조건을 찾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정치, 사회적 조건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자끄 엘륄 입문}, 193)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대한민국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화로운 국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마땅히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수단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민적 차원의 의무이지, 하나님나라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아닌 것이다.
다. 하나님나라 시민의 의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주(Lord)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신앙고백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Lord)시라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주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국가주의, 기술주의 등 어떠한 권력이나 권세에도 충성을 바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신성화되고, 절대화된 자본과 국가, 기술을 거부할 때,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경제적 반향이 초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 문제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엘륄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아예 정치 자체를 탈중심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나라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정치체제도 하나님나라의 정치체제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이 세상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과 거부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 탈정치화(deoplitization)라고 한다.
이러한 탈정치적 태도를 그는 ‘무정부주의’라는 말로 표현했다.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무정부주의를 말하는 것은 혼돈과 무질서를 옹호하거나, 혹은 폭력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무정부주의는 다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정부형태나 국가체제도 하나님나라와 같을 수 없기에 불신하겠다는 태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종말신앙이란, 역사의 끝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 나라는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닌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 신앙은 ‘마라나타’(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기원하는 매 예배 때마다 확인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영적 현실이 된다.
예배와 기도는 그러한 종말을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행위다. 고로 예배와 기도를 올려 드리는 교회는 늘 지상의 정부와 국가 체제의 불완전성과 임시성을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절대화되고, 정부가 신성화될 때, 정치 체제가 악마화될 때,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을 공공연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탈정치적 행위는 사실은 고도로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 정치판이 요구하는 규칙과는 무관한 정치 행위다. 그것은 오로지 기독교신앙이 규정하는 방식인 것이다.
엘륄은 이러한 탈정치적 정치행위, 곧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로 군복무에 대한 거부, 세금, 예방주사, 의무교육 등에 대한 양심적 거부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무정부와 기독교}, 23) 하지만 그가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규범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다만 “기독교에 대한 경고”를 목적으로 그러한 제안을 한다고 했다.({무정부와 기독교}, 125)
우리가 그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다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현대 기독교에 경고를 날리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의 이러한 경고는 특별히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이 된다. 정치 참여와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수, 아니면 진보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가. 심지어 교회가 죽은 대통령을 예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경고는 우리에게 진보나 보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편에 서는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는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이 다시금 고백해야 할 고백은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주(Lord)시오,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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