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영화 2016. 10. 1. 16:14

트루먼 쇼 - 선악과는 왜 만들었나?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 선악과는 왜 만들었나?




폴 리꾀르는 <악의 상징>에서 악의 신화를 네 가지로 정리해 보여 준다. '창조신화', '비극신화', '타락신화', 그리고 '유배된 영혼의 신화'가 그것이다(노파심에서 덧붙이지만 여기서 신화란 허황한 거짓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를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적 표현 양식으로 써 내려간 서사를 말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신화가 이 네 가지 유형론 속에 얼추 다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리꾀르의 통찰은 탁월하다. 피터 위어(Peter Weir)의 영화, '트루먼쇼(The Trueman Show)'는 리꾀르의 네 가지 신화 중 비극신화와 타락신화를 기묘하고 정교하게 잘 비벼서 만들어 낸 영화다. 트루먼쇼의 이야기가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그 이야기의 영감이 신화로부터 왔다는 것 때문이리라. 자고로 신화는 힘 있는 이야기(powerful narrative)이다!

'비극신화'’는 무엇인가? 희랍의 영웅 서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극신화는 선한 듯도 하고 악한 듯도 한 정체 모를 신(神)이 한 탁월한 인간에게 그가 감당하기에 과도한 운명의 짐을 지움으로써 시작된다. 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주의 운명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운명을 지기를 거부한다.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인간의 반항, 여기서 비극이 생겨난다. 이때 이 반항자를 '영웅'이라 부른다. 이때 영웅은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불행한 자들의 대변인이요, 동반자이다.


비극신화의 관점에서 볼 때,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비극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거짓된 세계를 살아야 할 저주받은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에게 운명의 짐을 덧씌운 자는 크리스토퍼 PD로서 씨헤이븐의 창조주다.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영웅의 반항, 이것이 영화, '트루먼쇼'의 줄거리를 구성한다. 이 영화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희극 속에 비극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짐 캐리라는 코미디언의 캐릭터 속에 오디세우스라는 비극적 영웅상이 오버랩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쇼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신화는 타락신화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타락신화란 선하게 창조된 원초적 순진무구의 세계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결정적인 실수 혹은 잘못에 의해 치명적으로 오염되고 타락해 버린다는 내용의 신화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가장 완전한 형태의 타락신화는 창세기의 아담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에덴은 본래 일절 오류나 잘못이 없는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 순진무구의 세계는 청정함을 잃고 만다.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은 바로 이 한 번의 결정적인 오류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타락하고 만다. 이러한 타락신화는 이 땅에 현존하고 있는 모든 현실적인 악과 고통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트루먼쇼'는 이러한 아담 신화를 기묘하게 재해석한다. 즉 영화 '트루먼쇼'에서 '씨헤이븐'은 에덴동산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그곳은 악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낙원으로 그려지고 있다. 에덴의 창설자는 크리스토퍼고 아담은 트루먼이며 이브는 실비아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씨헤이븐의 출구(EXIT)라고 할 것이다. 순진무구의 세계인 씨헤이븐은 트루먼이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버림으로써 쓸모없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영화 '트루먼쇼'에는 이 두 가지 신화 이외에 제3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율적 인간(Homo Autonomous)'의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근대사회를 출현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 자율적 인간의 신화이다. 이 신화는 계몽주의자들이 처음 만들어낸 신(神)이 없는 신화(神話)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트루먼쇼'에서 휴머니스트인 피터 위어 감독은 이 자율적 인간의 신화로 위의 두 가지 신화들을 뒤엎는다. 하여 주인공 트루먼은 시지프스나 프로메테우스와 닮았으되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지게 된다. 희랍 비극의 영웅들은 끝내 운명, 곧 신의 의지에 굴복되지만 우리의 트루먼은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끊고 신으로부터 해방된다. 여기서 비극 신화는 전복된다. 두 번째로, 아담 신화에 따르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원죄로서, 이 땅의 모든 악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씨헤이븐의 탈출은 위대한 인간 승리로 그려진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설령 지식의 나무가 아담에게 저주를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아담은 그것을 따먹을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야말로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 하여 트루먼은 스튜디오 벽 한가운데 뚫린 어둡고 무서워 보이는 출구를 보고 농담 한마디를 던지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와 함께 타락신화 역시 극복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창세기의 아담 신화를 부정함과 동시에 엉뚱한 방식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의외의 방식으로 창세기를 다시 읽게 한다. 창세기를 읽었던 수많은 독자는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라고 물어 왔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물음은 결국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좋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은 세상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은 낙원, 곧 에덴동산을 만드셨다. 낙원에서 악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도 사라지고 언제나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아담 부부를 살게 하셨다. 그들 부부는 좋은 사람들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선악과가 없다. 반역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에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길은 봉쇄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인사는 언제나 똑같다. "Good morning, and good afternoon, and Good evening, see you!" 이런 낙원을 살아가는 인류는 행복해야 맞다. 악과 고통의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 낙원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낙원의 모든 것이 트루먼 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지만 말이다. 왠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던 낙원에서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였다. 물론 트루먼에게 자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루먼쇼는 시나리오나, 큐싸인이 없는 훌륭한 리얼쇼(real show)일 수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에게 있는 모든 자유는 위장된 자유요, 안전한 자유며, 거짓 자유였다.


트루먼에게 필요했던 것은 진짜 같은 자유가 아니라 진짜 자유였다.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 베르자예프식으로 말하자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와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바로 이 자유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다. 선악과가 없는 에덴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만 주어졌으며, 악은 행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은 가짜다.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도 함께 주어지기 전까지 에덴은 언제까지고 낙원의 모습을 한 지옥일 것이며, 아담은 언제고 인간 모습을 가짜 인간일 것이다.


트루먼에게는 그 자신일 수 있는 자유와 함께 그 자신이 아닐 수도 있는 자유가 동시에 필요했다. 하지만 트루먼에게는 자신이기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true) 트루먼이지 못했다. 그는 강요된 트루먼이었기에 거짓 트루먼이다. 트루먼은 스스로 트루먼이기를 선택할 수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그는 스스로 트루먼이 아니기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자유가 아닐 수 없다.


선악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위험한 자유의 상징이며, 인간 조건의 표상이다. 이 점에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은총이다. 더구나 선악과는 씨헤이븐의 출구와는 다르게 숨겨져 있지 않았다.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아무런 제재 장치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아담 부부는 언제라도 선악과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아무 어려움 없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으며, 인간 조건에 대한 웅장한 찬미가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진정한 인간(true man)을 창조하셨다!


자유가 없다면 진짜도 없다. 때문에 씨헤이븐에서 트루먼(Truman) 참인간(true man)이 아니었으며, 주위 세계도 거짓이었다. 트루먼은 PD에게 묻는다. "이거 다 가짜 아니요?(Was nothing real?)" 이런 가짜 세계를 만든 창조주를 우리는 위대하다고 찬송할 수 없다. 자유가 없다면 모든 것은 위선이고 기만이다. 진실은 오직 자유로부터 나온다.


자유와 진실이 참사랑을 낳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선택에 실제성(reality)을 부여하며 선택의 실제성이 사랑의 진정성을 낳기 때문이다. 모든 강요와 조건이 배제된 상황에서만 참선택과 참사랑이 가능하다. 돈이나 권력과 같은 외적 조건으로 얻은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강요된 선택은 위장된 선택과 위선적 사랑을 낳을 뿐이다. '트루먼쇼'의 메릴이 바로 이것을 상징한다. 트루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곧 참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실비아는 바로 이 참사랑의 상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악과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임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함께 최고의 존엄을 인간에게 부여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참선택과 함께 참사랑을 받기를 원하셨다. 인간의 자발적이고도 조건 없는 선택과 사랑, 이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욥의 조건 없는 선택과 사랑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욥 1:9)! 들어 보라. 선악과 곁에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아담은 어찌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을까?


영화, '트루먼쇼'는 창세기 2~3장에 대한 훌륭한 영화적 재해석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선악과가 인간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며, 인간성을 짓밟는 노예의 조건이 아니라 참인간의 조건에 대한 웅장한 찬미임을 보게 된다. 선악과와 함께 인간에게는 참자유가 주어졌다. 그 자유가 인간을 참인간 되게 하고, 에덴을 참낙원이 되게 한다. 자유가 모든 것을 진실 되게 한다. 참인간으로서 아담은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짜 사랑 말고 그 위험스러운 진짜 사랑을…. 선악과와 함께 자유, 진실, 그리고 사랑의 낙원이 창조되었다.